<쇼코의 미소>는 최은영 작가의 첫 소설집이다. 이 소설집의 첫 작품으로 수록된 단편소설 '쇼코의 미소' 는 최은영 작가의 등단작이기도 하다. 첫 소설집이기 때문인지 작품 하나 하나가 대체로 강렬한 인상을 준다. 강렬하지만 전반적으로 잔잔한 문체로 등장인물들의 심정에 몰입하게 만든다는 것이 이 작가의 매력인 것 같다.
이 소설집에는 총 7개의 단편이 수록되어있는데, 여기에 수록된 작품의 공통점을 꼽자면 모두 '관계의 단절'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만 그 단절의 이유나 단절된 이후의 인물 간의 관계는 조금씩 다르다. 개인적으로 가장 몰입되었던 소설은 '한지와 영주'다. 영주는 프랑스의 수도원에서 봉사활동을 하던 중에 흑인 한지와 우정을 맺게 된다. 그러다 이유를 알 수 없이 어느날엔가 한지는 영주로부터 멀어지게 되는데, 영주는 끝끝내 한지에게 이유를 듣지 못하고 헤어진다. 나 또한 그렇게 누군가에게 절연 당한 경험이 있다. 그래서 이 소설의 풍경과 인물의 설정이 내 현실과 거리가 멀었는데도 불구하고 깊이 공감되었다. 가장 비현실적인 배경에서 만날 일이 없을 듯한 인물, 아프리카에서 온 '한지'와의 관계를 그린 소설이 가장 현실적이라고 느껴진다는 점이 참 아이러니하다.
이 소설집의 다른 두 작품, '쇼코의 미소', '씬짜오, 씬짜오'도 외국인과의 관계를 그린다. '쇼코의 미소'에서는 일본인 친구와의 관계를 다루었고, '씬짜오, 씬짜오'는 베트남 이웃과의 관계를 다룬다. '쇼코의 미소'에서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가까운 사람들에게는 절대로 속을 열어보이지 못하는 대신 살을 부딪치며 만날 필요가 없는 외국인에게 외국어로 편지를 써서 보내는 방법을 택했다. 만약 내가 일본인이었고, 쇼코의 주변에 사는 사람이었다면 쇼코는 내게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쇼코의 미소, 17쪽)
자신의 삶으로 절대 침입할 수 없는 사람,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먼 곳에 있는 사람이어야 쇼코는 그를 친구라고 부를 수 있었다. (쇼코의 미소, 18쪽)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때로 더욱 낯선 사람과 가까워지기도 한다. 낯선 이들과의 관계를 소재로 한 이 작품들은 그 점에서 갖는 미묘한 관계성에 주목하고 있는 듯하다. 작품에 나타난 인물들의 심리묘사가 매우 섬세해서 외국인 친구가 없는 나에게도 이런 친구가 있었던 것 같은 기시감을 느끼게 했다.
이 소설집이 가지는 또 한가지 매력적인 부분은 간간히 '멋있는 어른','선배'들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쇼코의 미소'에서는 할아버지가 있었고, '먼 곳에서 온 노래'에서는 학교 선배가, '미카엘라'에서는 엄마, '비밀'에서는 할머니가 있다. 그들이 하는 말이 마음을 울린다.
"나는 네가 이렇게 큰사람이 될 줄은 몰랐다. 서울에 가서 공부도 하구 영화감독두 되고. 힘든 대루 손 벌리지 않고 네 힘으로 살구. 까짓것 다 무시하면서 네가 하고 싶은 대로 살지. 난 그거, 멋지다고 본다." (쇼코의 미소, 38쪽)
"너가 어른 되면 남자고 여자고 없다. 너가 여자여서 안 된다는 소리 듣거들랑 무식한 소리구나 하구 비웃어버려. 넌 뭐든 다 되고 뭐든 다 할 수 있다. 너 땐 남자구 여자구 마음 바른 사람이 잘 살 거여." (비밀 중에서)
내가 듣고 싶었으나 듣지 못한 말들, 어쩌면 지금 살아가는 여성들 대부분이 들었어야 했지만 듣지 못한 말들 아닐까. 그리 거창한 말도 아니고 어떻게 보면 식상한 말일지 모르나 작품의 맥락속에서 나왔던 위의 대사들이 나에게 크게 와닿았다.
위에서도 얘기했지만 이 소설은 대체로 잔잔한 문체로 이루어져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작가가 묘사하는 상황들이 영화처럼 그려진다. 이 소설을 읽고난 후에는 너무 정서적으로 몰입되어 마치 영화 몇 편을 보고 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최은영의 다른 작품도 읽고 싶었지만, 조금 텀을 두고 다음 작품 <내게 무해한 사람>을 읽어야겠다고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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