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나도 그런 적이 있었지 - 최은영, <내게 무해한 사람>
최은영 작가의 두번째 단편소설집 <내게 무해한 사람> 은 그의 첫 번째 소설집인 <쇼코의 미소>보다는 다소 연하다는 느낌을 준다. 이 말에 동의하지 않을 사람들도 많겠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그랬다. <쇼코의 미소>에 수록된 소설들이 대체로 좀 더 강렬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는데, <내게 무해한 사람>은 강렬하다기보다는 아련했다.
이전 작품집 <쇼코의 미소>를 읽으면서도 느꼈지만 최은영의 문체는 시 같다. 짧게 짧게 끊어지는 문장들이 많아 소리내어 읽으면 리듬감이 느껴진다. 낯선 단어가 없어서 읽기에도 편안하다. 그러면서도 소설 속 장면 장면이 마치 영화처럼 그려진다. 영화로 치자면 상징적인 장면들이 잘 직조되어있고, 컷이 속도감 있으면서도 어지럽지 않게 배열되어있다. 최은영 작가는 작품을 쓸 때 자신의 감정을 90퍼센트 이상 담아낸다고 말했다고 한다. (기사 참고: 이투데이- 최은영 "' 내게 무해한 사람'은 아무 관계 없는 사람" http://www.etoday.co.kr/news/view/1656374 ) 그래서 그런지 누군가의 일기장을 읽고 있는 것 같은 느낌도 든다. 그리고는 '언젠가 나도 그런 적이 있었지'하는 기시감을 느낀다.
최은영 작가의 소설은 주요 등장인물과 화자가 대부분 여성인데(작가 자신이 여성이니 이 사실은 대수롭지 않게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첫 번째 수록작인 '그 여름'부터 레즈비언 커플의 사랑이야기를 담고 있다. 자매의 이야기(지나가는 밤), 모녀의 이야기(601,602), 숙모와 조카의 이야기(손길)가 담겨있기도 한데 모두 별개의 이야기이지만 '여성 가족 서사'라는 점에서 일맥상통한다. 이 책에 수록된 마지막 작품 '아치디에서' 만이 유일하게 남자 화자인데, 읽다보면 사실은 이 소설 역시 '하민'이라는 한국 여자가 주인공이라는 걸 발견하게 된다. 현 시대에 살고 있는 여성으로서 여성의 이야기를 하는 작가가 많이 필요하다고 느끼는 이때에 이런 최은영의 소설은 무척이나 반가웠다. 내가 겪어보지 못한 다른 세상에 대해 알기 위해 소설을 읽는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지만, 최은영의 소설을 읽다보니 나를 거울처럼 비춰주고 언어화해주는 그 이야기들이 더 절실히 필요했다는 걸 깨닫는다. 엄마를 비롯한 내가 아는 모든 여성들에게 최은영 작가의 작품을 읽어보라고 추천하고 싶다.
- 책을 읽으면서 책갈피 해두었던 몇개 구절을 덧붙인다.
p. 20 수이에게 축구는 세상과 자신을 연결시켜줄 수 있는 단 하나의 끈이었다. 그런 수이에게 이경은 선택에 대해 말했다. 자신에게 주어진 선택지가 수이보다 훨씬 더 많았다는 사실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한 채로. -'그 여름' 중에서
p.73 "아들이 뭐라고." 그렇게 말해왔으면서도 결국 엄마가 속한 세계는 그런 곳이었다. -'601,602' 중에서
p.127 네가 뭘 알아, 네가 뭘. 그건 마음이 구겨져 있는 사람 특유의 과시였다. -'모래로 지은 집' 중에서
"넌 누구에게도 상처를 주지 않으려 하지. 그리고 그럴 수도 없을 거야. 넌 내게 무해한 사람이구나." - 뒷표지에 수록된 구절, '고백' 중에서
p.225 여자의 행동은 혜인에게 이런 메시지로 다가왔다. 이렇게 쉽게 떠나버릴 수 있을 정도로 너와 나 사이는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사실 넌 내게 그렇게 중요한 사람도 아니었다고. 그때의 혜인에게 여자의 태도를 이해하고 넘어간다는 것은 그런 메시지에 동의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였다.
그렇게 오래도록 이해하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그런 식으로 도리어 여자와 함께한 시간의 의미를 붙잡으려 했는지도 모른다고. 오래도록 알고 있었으면서도 모른 척했던 그 사실을 혜인은 그 겨울 내내 응시했다. - '손길' 중에서
p.231 어쩌면 여자도 울고 싶었는지 모른다. 혜인에게 기대어 자기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행동들이 혜인과 자신 사이를 망쳐버릴까봐, 혜인을 떠나게 할까봐 자제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명랑한 사람이고, 나는 심각하지 않은 사람이고, 나는 가벼운 사람이고, 그런 사람이어야지 버림받지 않고 관계를 맺어갈 수 있다고 배우며 자라왔는지도 모른다. 더이상 웃음으로 자신을 방어할 수 없는 순간이 되었을 때 여자가 할 수 있는 무엇이었을까. 혜인은 생각했다. - '손길' 중에서
p. 274 나는 눈을 감은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내가 알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서. 그저 그녀의 곁에 같이 서 있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서. 하민, 하민, 하고 그녀의 이름을 몇 번 부르다 침묵이 내게는, 그녀의 고통과 무관한 내게는 더 합당하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밖에 없어서. -'아치디에서'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