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일기

판타지와 현실의 경계에서 보다 현실적인- 정세랑 소설집, <옥상에서 만나요>

리미로그 2020. 3. 9. 11:56

yes24 책소개 페이지에서-

  올해 나는 서른을 맞았고, 서른이 되어 처음 읽은 소설책이 정세랑의 단편 소설집, <옥상에서 만나요>였다. 책 리뷰를 하는데 굳이 내 나이를 먼저 언급하게 된 까닭은 대략 나이대의 여성들이 더욱 공감할만한 소설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작가인 정세랑도 1984년생으로 삼십대 중후반 정도로 나와 나이 차이가 많이 나지 않는다. 소설을 그리 많이 읽는 편은 아니지만 원로 작가들의 작품을 많이 읽다가 젊은 작가의 소설을 읽으니 확실히 신선하고 재밌는 표현들이 많다는 느낌을 받았다.

인상깊었던 건 이 단편집의 첫 소설, "웨딩드레스44"

이 소설의 형식이 매우 특이하다. 어떤 밋밋한 웨딩드레스에 대한 소개로 시작되고 그 웨딩드레스를 거쳐간 44명의 여성에 대한 짤막한 이야기들이 묶여있다. 이야기라기엔 정말 아주 짧게 두 문장인 경우도 있고 길게는 두 페이지를 넘는 정도다. 나는 이 책의 제목에 있는 44가 44사이즈를 의미하는 것인 줄 알았다. 하필 44인 건 그렇게 볼 수도 있다는 의도가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여자의 사이즈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은 44 사이즈가 흔한 사이즈인 줄 알지만 사실 흔치 않다. 그런데 웨딩드레스를 입을 땐 어쩌면 흔한 사이즈가 되는지도 모른다. 많은 사람들이 결혼식 때 예뻐보이기 위해 혹독한 다이어트를 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 소설의 44명의 결혼 이야기 중에는 딱히 다이어트를 하는 여성의 얘기는 나오지 않는데, 44라는 숫자를 보고 드는 생각일 뿐... 아무튼 이 소설 속에서 재미있는 단락들이 많아 책갈피를 여러개 해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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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행복한 순간에도 기본적으로 잔잔하게 굴욕적이야. 내시간, 내 에너지, 내 결정을 아무도 존중해주지 않아. 인생의 소유권이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넘어간 기분이야."

"남편이 문제가 아니야. 내가 제도에 숙이고 들어간거야. 그리고 그걸 귀신같이 깨달은 한국사회는 나에게 당위로 말하기 시작했지."

...왜 다른 사람의 생식과 생식기에 대해 그렇게 편하게 이야기하는 것인지 기이할 정도였다.

-정세랑, '웨딩드레스44' 중에서

 

그리고 나는 다른 단편들보다도 역시 표제작인 "옥상에서 만나요"가 좋았다.

이상한 괴담을 따라 남편을 소환하는 데, 알수없는 생명체(?) 같은 것이 나와 어쩌다 동반자로 맞아 잘 살아가는 이야기. 판타지와 현실의 경계에 있는 이야기를 잘 쓰는 정세랑의 매력이 가장 잘 드러나는 듯한 소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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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는 절망의 이름을 불렸다. 모두 사실 그게 절망이라는 사실을 다 알고 있었다니. 위로가 되기도 했고 알고서도 그냥 두는게 무기력하게 느껴졌다. 그 비서를 썼던 여자들도 간절하게 자기 절망에서 구원되기 위해서 노력했겠지? 내가 알만한 절망들은 어이 없게도 말도 안돼는 해결책으로 풀어나갔다. 그렇다고 엄청 나은 방식이 된 것도 아니고. 세 언니는 얼굴에 윤기가 흐를 정도로 과거보다 조금 나은 상태로 살아갈 수 있는 직장으로 옮겼을 뿐이다. 주인공인 나도 괴상한 남편을 얻어 이세계로 빠져드는 것은 아닐까 했다. 하지만 그는 충분히 삶의 동반자로 역할해주었다. 놀랍게도 말이다.

-정세랑, '옥상에서 만나요' 중에서

그 밖에 작품들은 "효진", "알다시피, 은열", "보늬", "영원히77사이즈", "해피쿠키이어", "이혼 세일", "이마와 모래" 가 있었는데, 모두 재밌게 읽기는 했지만 하나하나 감상을 늘어놓자면 너무 길어지니 적당히 생략하기로 한다.

전반적인 인상은 판타지적 설정을 많이 담고 있는 동시에 구질구질한 현실을 잘 묘사하는 부분들이 재밌다는 것. 남녀 관계에 대한 얘기가 많았는데, 보통의 남녀관계 역할극을 뒤엎는 관계들을 묘사하는 것- '해피쿠키이어'에서의 남주인공의 헌신이라든지, '영원히77사이즈'에서 여주인공-에 대한 이야기가 유쾌하다. 그런데 어쩌면 너무 가볍게 읽혀서 휘발되어 버리는 듯한 이야기인지도 모르겠다. 친한 친구들과 시덥잖은 농담을 하고 난 느낌이랄까. 그 느낌이 어쨌든 좋았다. 한 번쯤 부담 없는 소설 책을 한 권 읽고 싶다는 사람이 있다면 추천해줄 것 같다.